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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이야기
    Entrepreneur 2022. 6. 17. 12:30

    아버지는 1943년 4남 3녀의 둘째로 경상도 함안에서 태어났다. 집은 전형적인 농가였고 어렸을 때부터 농사일이나 들일을 했으나, 어린 시절에는 집안에 논이나 밭이 거의 없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다.

    어렸을 때 먹을걸 제대로 먹지 못해서 발육이 더뎠고, 군대 신검 나이에 키가 150cm가 되지 않아 키 때문에 면제를 받았다.

    6.25 시작했을 때 나이가 7살, 6.25 끝났을 때가 10살이었기 때문에 그때 기억을 어느 정도 가지고 계신다. 가족 전체가 전쟁 때문에 부산으로 걸어서 피난을 갔고 가다가 먹을 게 없어서 엄청 고생을 하다가 전쟁이 끝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이 다 허물어지고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정규 교육은 중학교 정도만 받으신듯 하지만 자존심 때문인지 항상 고등학교까지 다녔다고 하신다. 학교 교육을 마치고 농사일을 하다가 같은 동네의 누군가가 서울에 도금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서울로 상경한다. 아버지 애기로는 농사일하는 게 그렇게 힘들고 싫었다고 한다.

    그 당시 함안에 누군가가 서울로 올라가 도금공장 하나를 우연히 시작했고 그 연으로 동향 사람들이 상경해서 그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자기 사업으로 분가해서 사업을 시작한 사람이 많았었다. 아버지도 그중에 하나였다. 다니던 공장을 그만두고 자기 사업을 시작한 이유는 공장에서 하는 힘든 일에 비해 처우가 너무 열악했고, 그걸로는 미래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고 한다. 

    선후는 정확하지 않지만 자기 사업을 하던 시기중 시골에서 집안끼리 혼사를 정해서 어머니와 결혼하신다. 어머니나 아버지는 결혼전 누구와 결혼하는지도 모르고 집안에서 정해준 대로 결혼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 보다 5살 적고, 1남 5녀 (?)의 막내였다. 외갓집은 그 당시 아버지 집보다는 풍족해서 먹고사는 걱정은 별로  없었고, 막내라 집안일을 하지 않아서 시집을 와서 처음엔 밥도 할 줄 몰랐다고 한다.

     

    결혼한 첫해는 집을 얻을 형편이 안되서 아버지는 서울에 있고 어머니는 함안 친정에 떨어져 계셨다. 그 당시 할머니 (어머니 에겐 시어머니)가 처음 어머니한테 시킨 건 아침에 일어나면 집안 식구들 고무신을 깨끗이 씻어서 두고 아침을 하라고 하셨다.

    잠은 시어머니하고 시누와 같은 방을 쓰고, 낮에 밭에 나가 일하다고 비가 오면 그냥 맞고 들어와서 눅눅한 몸을 씩거나 옷 갈아입을 공간이 없어서 고생하던걸 지금도 기억하신다. 1년 후에 어떻게 작은 월세를 하나 얻어서 어머니는 서울로 올라오고 내가 첫째로 태어났다.

    2년 터울로 둘째인 여동생이 태어났는데 어머니도 서울 올라와 잘 먹지 못하고 생활환경이 열악해서 임신중독으로 고생하고 동생은 출생 당시 체중이 얼마안되는 미숙아였다.

     

    도금업은 독한 화학약품과 전처리로 도금하는 쇠 덩어리를 사람 손으로 매끈하게 다듬어야 하는 험한 작업이다. 1970년대는 일을 하면 상대 업체가 바로 돈을 주지 않고 어음이라는 몇 달후에 이 어음을 가진 사람에게 돈을 주겠다는 문서를 받았다 . 단 몇달 후에 돈을 상환하는 시기에 어음을 발행한 업체가 상환을 못하면 일하고 받은 대금을 때이게 된다. 그걸 부도라고 하는데 숱하게 받은 어음을 부도 당해서 일하고 돈을 못 받는 일이 빈번했고 아버지 본인도 몇 번을 부도를 일으켜 사업을 다시 시작해야 했었다.

    대략 10년 고생하시고 1980년대 내가 초등학교 4년 때에 서울 사당동 쪽에 단독 주택 하나를 어찌어찌 마련하고 10여 년 월세만 전전하던 신세를 모면하셨다.

     

    어머니 아버지가 70년대 월세로 신혼을 꾸려가는 동안에 아버지 바로 밑의 동생이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와서 아버지 집에서 같이 생활을 하면서 대학교 진학을 준비하다가 성적이 안돼서 결국 아버지 사업하는 공장에서 같이 일하게 되었고 (요즘 말하는 가족 기업의

    탄생이었지만 그 당시 도금업 같은 험한 일을 대부분 이렇게 알음 알음으로 인력 채용을 했다) 그 다음 동생도 대학진학 한다고 우리집에서 재수, 삼수를 하게 된다. 어머니는 두명의 시숙을 그당시 수발 든거 말고도, 아버지 형님의 조카, 고모의 조카, 조카의 친구들 등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숫한 사람들이 우리집을 교두보로 사용해서 몇일 혹은 몇달 혹은 몇년동안 머물렀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에게는 다 귀찮고  힘든 일이었지만 나는 자라나면서 이런 집안 환경덕에 다양한 사람들을 접할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90년대는 중후반에는 사업이 잘되어 사업을 확장하다가 90년대 후반 IMF가 오면서 공장이 거의 망하게 된다. 그당시 아버지 바로 밑의 동생에게 도금 공장을 맡기고 아버지하고 또 다른 동생은 도금업 말고 제품을 만드는 다른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바로 밑 동생은 도금 공장이 방만하게 운영하다 IMF를 맡았고 이 당시 공장이 빚잔치를 하는 와중에도 동생은 회사 돈을 횡령하면서 본인의 몫은 챙긴 게 발견되었다. 결국 도금 공장은 부도로 잃게 되고 집이나 집안 가구들이 암류 돼서 빨간딱지가 붙는 일도 생겼다. 어머니는 항상 이때 기억을 가장 끔찍했던 일로 기억하신다.  나는 이때 군대에 있어서 직접 보지는 못했다.
    IMF가 지나가면서 거의 앞이 안 보이는 시점에 확장해서 하고 있던 사업의 아이템이 하나가 조금씩 팔리기 시작해서 기사회생하게 된다.

    이 당시 잘 팔리던 아이템으로 큰돈을 벌게 되는데, IMF로 대부분의 경쟁업체가 죽어서 얻은 기회였다.

     

    공장에 여유 자금이 쌓이면서 다른 사업을 모색하게 되는데, 주변 사람의 소개로 한 사람이 개발 예정이 산림에 나무를 미리 심어놓으면 이후 개발지역을 정리하면서 나무 주인에게 나무 한 그루당 얼마씩의 보상금을 준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 아이디어를 주도하고 나무를 심을 땅을 소개해준 사람은 아버지나 동생들을 자주 만나면서 유력한 공무원들을 소개해주어서 이 아이디어가 확실한 돈 벌 방법이란 걸 확신시켜주었고, 결국 IMF 이후 벌어둔 대부분 돈과 주변 사람들 돈까지 끌어들여서 일을 진행시킨다.

    하지만. 땅은 개발되었지만 정부에서도 이런 형태로 돈을 타내는 사람이 이전에 많았던 듯, 미리 항공사진을 찍어놓은 게 있어서 한 푼도 못 받고 말았다. 아버지는 이걸 사기라고 하지만 욕심이 앞서 정부 돈 공짜로 먹겠다는 아버지도 떳떳하지는 못했다. 아버지는 결국 주변 사람들 돈을 공장 자금으로 메워주었다. 이 일 이외에도 사업 외 일로 경매나 부동산에 여유자금을 굴렸지만 별로 도움은 못되고 대부분 잃고 말았다.  아버지 생에 돈을 모은 시기는 바로 이때인데 결국 어찌어찌 다 없어져서, 아버지는 항상 자기 복이 이거밖에 안된다고 하신다.

     

    2000년대가 와서 하던 사업들이 점점 쇠퇴하고 매출이 줄어들자, 2-3가지 사업 아이템을 변경하다가 옆  공장에서 하던 일을 똑같이 시작하고 그 일이 조금씩 잘 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하고 계신다. 여전히 노동 집약적이고 독한 화공약품을 쓰는 일이라 공장엔 한국인은 본인의 동생들하고 오랫동안 일한 한 명밖에 없고 다 필리핀이든 조선족 같은 외국노동자이다.

     

    시골에서 아무것도 없이 서울 올라와 50년을 자기 사업을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에는 잘 몰랐는데, 내가 50대가 되니 그 무게가 점점 실감돼서 간단히 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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